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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기념관

 

 

 

8월 중순이 꺾여가면서 산책하기에 날씨가 너무 좋아지고 있습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올해로 74주년째를 맞는 광복절이 지나가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어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어서 식사 후 종종몇번 가봤지만

 

 

 

 

광복절을 맞이하고 가는건 또 처음이네요

 

 

 

 

 

 

유명한 삼순이 계단을 지나는 코스로 안중근 의사를 만나러 갑니다.

 

 

 

사실 이 계단은 알게모르게 다른 드라마나 시트콤에서도 몇번 본 장소였더군요..

 

 

 

 

 

 

 

 

올라가면 안중근 의사 동상이 맞이하고 있습니다.

 

 

 

늠름하게 서있는 모습이 스스로 숙연하게 되네요..

 

 

 

 

 

 

 

 

안중근 의사 기념관입니다.

 

 

 

 

서울시건축상을 받은 예쁜 건물이에요

 

 

 

 

 

 

 

기념관 앞에 공원도 잘 꾸며져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여기저기 많이 담아두려고 노력한것 같아요

 

 

 

 

 

 

처음 가는 사람들은 전시실 입구를 찾기 힘든데

 

 

 

 

맨 우측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앞쪽에 문 같이 생긴곳은 다 닫혀있는 문이에요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누구인가?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아래

 

 

어린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수학하고 무술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하였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 계발을 위해  '대학'설립을 계획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둥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 마을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1909년 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0월 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 독립, 동양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 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전시실을 입장하면

 

 

 

바로 앞에 앉아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기운에 

 

 

 

여기서부터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숨소리를 죽이고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게됩니다.

 

 

 

 

 

 

 

 

 

기념관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입니다.

 

 

 

 

 

 

 

 

 

 

 

 

독립운동의 피가 흐르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문입니다.

 

 

 

이런 선조를 모신 후손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닌

 

 

 

간단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어린이들도 지루하지 않은 장소로 만들고자하는 설계자의 노력이 보이네요

 

 

 

 

 

 

 

 

비도 상황보고는 평안남도 상원군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의 활동을 추적해 보고한 일제 평양경찰서의 보고서입니다.

 

 

 

 

의병활동 조사표는 일제가 한국 의병을 폭도라고 칭하여 활동상을 월별로 조사하여 대처한 문서입니다.

 

 

 

 

 

 

 

연중근의 의사 연해주 활동

 

 

안중근의 의사는 연해주 각지 한인마을을 순회하며

 

 

교육과 상업의 발달을 도모하고 민심 단합을 목표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안의사는 의병대열에 참여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해 나갔다.

 

 

안의사와 가의 동지들은 크라스키노를 근거지로 삼고 국내진입작전을 벌여나갔다.

 

 

크라스키노를 중심으로 한 국외의병에는 홍범도 같이 국내에서 항쟁을 하다가 망명한 의병도 많았고,

 

 

연해주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편성된 의병부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의사와 같이 국내외에서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참여한 인물들도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단지한 손가락

 

 

안중근의사는 자신의 힘으로 기필코 조국을 독립시킬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를 끊었다.

 

 

그리고 그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써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하에 알렸다.

 

 

 

 

 

 

 

 

 

 

 

동의단지회

 

 

안중근의사는 패전에도 굴하지 않고 1909년 2월,

 

 

크라스키노의 하리마을에서 11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동의단지회는 '조국독립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목표로 삼고

 

 

왼손 약지의 첫 관절을 잘라 단지동맹을 맺었다.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동의단지회의 의병 재기를 다짐한 애국결사였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계획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중근은 이를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우덕순, 유동하 등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신중하게 의거 계획을 세웠다.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채가구 역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 역은 안중근이 맡아 의거를 하기로 하였다.

 

 

 

 

 

23일 밤,

 

 

안중근은 의거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의거가를 지어 이에 화답하였다.

 

 

24일에는 채가구 역으로 이동하여

 

 

 

25일에 채가구 역에서 의거를 맡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남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하얼빈의거 시 안중근의사가 사용한 권총과 총알

 

( 총번 : 브라우닝 262336 )

 

 

총알의 진본은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가 맞은 것이 축출되어 현재 일본 헌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하얼빈 의거 자료

 

 

 

안중근의사의 재판

 

 

 

 

 

안중근의사 불법 인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강압에 의해 불법적으로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신병이 인도되었다.

 

 

그리고 11월 1일 하얼빈에서 출발하여 11월 3일에 뤼순감옥에 입감되었다.

 

 

일제의 법원은 민선 변호인단을 금지하고 언론도 봉쇄한 채 재판을 진행하였다.

 

 

또한,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는 안중근을 사형에 처할 것을

 

 

법원 당국에 명령하여 공정한 재판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안중근은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임무수행중에 포로로 잡힌 것임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묵살된 채,

 

 

마침내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언도되었다.

 

 

 

 

(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라고 즐겨야 할 것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 사형 언도일로 기억해야한다. )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감옥시설

 

 

 

 

1954년 해방 후 안중근 의사 순국 44주년 추념사에서 낭독한 애도사

 

 

 

 

 

 

아이들이 안중근의사에게 쓴 손편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간중간 정수기도 준비되어 있어 마른목을 축일 수 있었다.

 

 

 

 

 

 

 

안중근의사 찬(讚) 이은상

 

 

조국이 기울어 갈제

정기를 세우신이여

역사의 파도위에

산같이 우뚝한이여

 

해달도 길을 멈추고

다시 굽어 보도다

 

 

 

 

 

 

 

 

 

안중근의사 찬(讚) 이은상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날 하르빈 역두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 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줬을까

 

 

세월은 말이 없지만

망각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서 가지만

 

 

그 뜻은 겨레의

피줄속에 살아있네

그 외침은 강산의

바람속에 남아있네

 

 

 

 

 

 

마지막으로 나올 때 추모공간에서 잠시 머무르고 나오며

 

 

 

 

 

안중근의사의 흔적들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안중근의사

 

 

굉장히 역동적이고 멋있는 작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안중근 의사 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 하절기 ( 3월 ~ 10월 ) : 10:00 ~ 18:00

 - 동절기 ( 11월 ~ 2월 ) : 10:00 ~ 17:00

 

입장시간은 관람마감 1시간 전

 

 

휴관일

 - 1월1일

 - 설날 및 추석연휴

 - 매주 월요일 ( 공휴일에는 다음날 )

 

 

 

 

 

 

 

 

마지막으로 나올 땐 안중근 의사의 옥중유묵을 새겨 놓은 길을 따라가며 되돌아왔다.

 

 

백인당중유태화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
년년세세화상사세세년년인부동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
견리사의견위수명
용공난용연포기재
인무원려 난성대업
오로봉위필청천일장지삼상작연지사아복중시
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
사군천리이표촌성망안욕천행물부정
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
박학어문 약지이례
제일강산
청초당
고막고어자시
인지당
인내
극락
운재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국가안위 노심초사
위국헌신 군인본분
지사인인 살신성인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
임적선진 위장의무

 

 

 

 

 

 

 

카페 마뫼

 

 

 

 

 

 

처음에 올라왔던 삼순이 계단을 내려가면

 

 

 

 

마뫼 커피라고 커피숍 같이 않은 커피숍이 하나위치해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긴 코스를 돌아다니니 힘드니

 

 

 

야외테라스에서 서울 회현 명동쪽의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면서

 

 

 

커피한잔 하고 마무리하였다.

 

 

 

 

 

 

 

 

 

 

카페 마뫼 영업시간

 

매일 12:00 ~ 23:00

 

주소 : 서울 중구 소파로 41 ( 회현동1가 산1-20 )

 

전화번호 : 02-776-2008

 

 

 

 

 

 

 

서울의 갈만한 곳을 찾다가 갈만한 곳이 없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한번쯤 들려보시길 권장합니다.

 

 

귀중한 시간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특히 자녀가 있다면

 

 

아이들과 함께 주말 나들이로 와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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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나여

일상 제품리뷰와 맛집/여행/사진을 좋아하고 IT 관련 프로그래밍 초급 & 고급 정보를 공유하는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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